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유로마이단 혁명 (문단 편집) == 전개 == [[파일:external/2daba9b4118c897b27de205827df80123bba9830d7864344e36834e388bf1b3a.jpg]] 2013년 11월 21일, EU는 우크라이나를 영향권내로 진입시키려는 구상이 실패한 것에 아쉬워하기는 했으나 주권국가의 정당한 결정이니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내부의 친서방 세력이[* 야권, 우익, 반러시아 세력들까지 다양하게 뭉쳤다.] 우크라이나 경제가 러시아에 완벽하게 예속당할 것이라 주장하며[* 특히나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에 군대를 대규모로 배치시킨것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반감과 불안이 우크라이나에서는 크게 증폭된 상황이었다. 한국의 경우 북한과의 특수한 관계로 인해 국경에 군을 배치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경우가 많으나, 일반적으로 한 국가가 타국과 마주한 국경에 군을 배치하는 행위는 전쟁을 암시하는 도발로 인식된다.] 크게 반발해 대규모 시위에 나선 것이었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D0%A1%D0%B8%D0%BB%D0%BE%D0%B2%D0%B8%D0%B9_%D1%80%D0%BE%D0%B7%D0%B3%D1%96%D0%BD_30.11_5_%D0%BA%D0%B0%D0%BD%D0%B0%D0%BB.jpg]] '''우크라이나 내무부의 특수부대인 베르쿠트가 시위대를 공격하는 것이 생방송되는 모습'''. 11월 30일, 베르쿠트가 시위대를 공격하면서[[http://www.youtube.com/watch?v=TATn7Q207y0|#]][[https://web.archive.org/web/20131130091958/http://rt.com/news/ukraine-police-disperse-protest-509/|#]][[http://www.kyivpost.com/content/ukraine/75-were-injured-during-nov-30-dispersal-of-euromaidan-333103.html|#]] 79명 이상이 부상당했고, 이로 인해 다음 날인 12월 1일 키이우에서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76px-Euromaidan_in_Kyiv_early_evening_2013-12-10_%28016%29.jpg]] 12월 8일에는 키이우의 [[블라디미르 레닌|레닌]] 동상을 시위대가 무너뜨려 아작내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 깃발[* 흑과 적색.]을 꽂아버렸고, 이는 야누코비치 정부와 러시아에게 충격을 주었다. 야권, 반러, 친서방 세력의 반대는 격렬했고, 야누코비치는 이에 굴복하여 서방과의 협상을 재개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시위가 잠시 잠잠해졌으나 문제가 야누코비치는 위의 결정을 뒤엎고 오히려 이참에 반대파를 억누르기로 결정한다. 특히 시위를 원천 봉쇄하기 위해 시위를 금지하는 반민주적 법안인 '''반시위법'''을 제정, 공표한 것을 계기로 반대파가 완전히 폭발하여 [[2014년]] 1월 이후부터 대대적인 반정부운동이 시작되었다. 결국 반시위법에 대한 반대가 반시위법을 공표한 정부와 정권 전체에 대한 반대와 불복으로 이어지면서 EU와의 협상 재개를 요구하던 시위는 반시위법 폐지까지 요구하며 전면적인 반정부 투쟁으로 번져나갔다. 하지만 야누코비치 정부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강경진압을 천명하여 수도 키이우는 1월에서 2월 초중순까지 대규모 시위와 이의 진압이 반복되었다. 이 시위에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다 참여해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시위였다. 시위가 확대되면서 정부 역시 대규모의 경찰을 투입하여 더욱 과격하고 강압적으로 진압에 나섰다. 진압이 점점 과격해지자 시위대는 정부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며 진압부대에 맞서기 위해 [[갑옷]]과 [[방패]], [[철퇴(무기)|철퇴]][* 이 장비를 얻기 위해 박물관까지 습격해서 가져오기까지 했다.], 심지어 [[투석기]]까지 동원해 무장을 했기 때문에 수도인 키이우에서는 중세 시대까지나 보였던 중장보병들간의 라인전이 벌어지는 상황까지 일어났다. 도심 곳곳에 시위대가 바리케이드를 설치하며 사실상 해방구를 형성하고 진압하려는 경찰들과 격전을 벌였다.[* 특히나 군 출신들이 선두에 나서서 경찰과 쌈질을 했다.] 게다가 무력충돌의 수위가 심각해서 돌과 화염병이 날아드는것은 물론이고 중장보병들끼리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각목이나 봉에 불꽃놀이용 폭죽(스틱처럼 생긴)을 달고 경찰들에게 발포하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시위대는 경찰이 쏘는 최루탄에 맞서기 위해 방독면까지 가져와서 쓰고 저항했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의 정교회에서 시위대와 경찰에게 폭력을 쓰지말고 물러설것을 호소했으나 허사였다. 결국 정부 측이 총을 발포하고 시위대도 활과 새총같은 원거리 무기로 대응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누가 먼저 총을 쏘았는지에 의문이 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예를 들어 [[미국]]에 고용된 [[조지아인]] [[저격수]]들이 시위대와 경찰 양측에 발포하여 사태를 격화시켰다는 주장이 있다. 러시아측 미디어들은 이런 가짜뉴스들을 대대적으로 유포하였다.[[https://sputniknews.com/europe/201802141061632008-ukraine-maidan-georgian-snipers-evidence/|#]] 이 가짜뉴스들에 대한 반박은 다음 사이트들을 참고하라.[[https://mythdetector.ge/en/fake-documentary-on-georgian-snipers-participation-in-maidan-developments/|#]][[https://mythdetector.ge/en/four-inaccuracies-in-disinformation-about-georgian-snipers-allegedly-opening-fire-on-protesters-rallying-on-maidan/|#]][[https://www.stopfake.org/en/fake-georgian-snipers-shot-maidan-demonstrators/|#]]], 최초 시위대 사망자는 2013년 12월 22일 베르쿠트에 폭행당해 사망한 파벨 아나톨리요비치 마주렌코다. 그 이후에도 2014년 1월 18일 시위를 주도한 유리 타라소비치 베르비츠키가 납치당한 뒤 '''고문사한 시체로 발견됐으며''', 시위대의 첫 총상 사망자는 2014년 1월 22일 세 발의 벅샷을 맞고 사망한 세르히 니고얀이다. 그 이후에도 2014년 2월 18일 직전까지 시위대 여섯 명이 더 사망했다. 이 여섯 명의 사인은 각각 총상, 총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물대포로 인한 폐렴, 교수형(그렇다. 시위 참가자를 가로수에 목매달아버렸다), 폭행, 차량 폭발로 인한 전신화상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 우크라이나 경찰이 이미 산발적으로 총기를 사용하고 있었음은 물론 '''야누코비치 정부의 폭력행위가 도를 넘었다는 건 변명할 여지가 없으며''', 이러한 맥락을 모조리 지워버린 다음 경찰측 집단발포로 사망자가 폭증하기 시작한 2월 18일 누가 먼저 발포했는가를 논하는 것 역시 명확한 편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5.18 관련 음모론자들이 맨날 들고 나오는 레파토리로 익숙한 소리 아닌가-- 경찰측 사망자는 경찰측이 집단발포를 시작한 2월 18일부터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경찰측이 집단발포를 시작해 유혈 참사가 본격적으로 확대된 2014년 2월 18일 역시 마찬가지로 시위대의 첫 사망자는 오후 12시경 사망한 블리디미르 자하로프였으나, 첫 경찰 사망자이자 경찰 총상 사망자는 17시경에 발생했다. '''이날에만 시위 참가자 23명이 사망했다.''' 상당수가 총상과 수류탄 폭발 사망자였다. 경찰 사망자는 다섯 명이었다. 2월 19일에는 시위대 8명, 경찰 3명이 사망했다. 최악의 유혈사태는 20일 벌어졌는데, '''시위 참가자 47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찰측 사망자는 4명이었다. 사망자 발생 시점과 극도로 불균형한 폭력의 강도, 그리고 경찰이 이전부터 간헐적으로 총기를 사용해 시위대를 사살했음을 감안하면 어느 쪽에 발포 책임의 무게가 실리는지는 명확하다. [[파일:external/i2.media.daumcdn.net/20140220170809891.jpg]] 2014년 키이우 시가전 중 시위대의 새총. [youtube(nIp34wW3k90)] 키이우 시가전 중 화염병을 맞는 경찰측 장갑차 [[파일:/image/003/2014/02/20/NISI20140220_0009380627_web_59_20140220164208.jpg|width=500]] 이 정도면 사실상 [[내전]]이나 다름없다. 10년 전 [[오렌지혁명]]이 심장마비로 발생한 사망자 1명을 제외하면 사실상 무혈혁명이었던 데 비해 이번 시위는 이미 본격적인 유혈사태로 넘어간 상태다. [[http://tonaitoo.egloos.com/2130527|시위현장 사진들 #1]] [[http://tonaitoo.egloos.com/2130584|#2]] [[http://tonaitoo.egloos.com/2131064|#3]] [[http://tonaitoo.egloos.com/2133257|#4]] [[http://tonaitoo.egloos.com/2133335|#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